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디라 간디 (문단 편집) === 인도 총리 === 의외로 인디라 간디가 총리로 추대된 가장 큰 이유는 그녀가 여자였기 때문이다. 그녀를 아버지의 후광만 등에 업고 승승장구한 애송이로 여겼던 당내 지도부가 그녀를 꼭두각시 총리로 올려놓고 제 마음대로 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 그래서 그녀의 집권 1년차까지만 해도 언론에서는 그녀를 '궁기 구디야', [[힌두어]]로 '꼭두각시'라고 부르며 노골적으로 당내 지도부의 허수아비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인디라 간디가 치렀던 첫 전국단위 선거는 1967년 총선이었는데, 이때 [[중인전쟁]]과 물가 상승, 높은 실업률 등으로 인해 나라 전체가 뒤숭숭했던 탓에 인도 국민회의는 의석 과반을 차지하긴 했지만 이전에 비해선 줄어든 283석에 그쳤다.[* 개헌선을 훌쩍 넘겼던 1961년 총선에 비해 크게 의석수가 떨어진 283석에 그치는 사실상의 패배였다] 인디라 간디는 울며겨자먹기로 [[루피]]를 강제로 평가절하하면서 물가 안정을 꾀했고, 이로 인해 사업가들과 자본가들에게 엄청난 욕을 들어먹으면서 꽤나 험난하게 임기를 출발했다. 이쯤 들어서 인디라 간디는 점점 당내 지도부와 충돌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었다. 인디라 간디의 사회주의적인 정책, 그리고 무엇보다 인디라 간디 총리가 저들의 말을 고분고분 들어먹지를 않자 그녀를 한낱 허수아비로만 여겼던 당내 기존 지도부들의 불만이 커져갔던 것. 특히 인디라 간디 총리는 당 지도부가 정한 대통령 후보를 무시하고 V. V. 기리를 따로 인도 대통령으로 지지하면서 아예 지도부와 다른 길을 걸었고, 재무부장관 [[모라르지 데사이]]와는 전혀 상의없이 재정 정책들을 발표하자 갈등은 더더욱 증폭된다. 결국 인도 국민회의 당대표였던 니자링가파가 그녀를 당에서 제명하겠다고 선전포고하면서 당정갈등의 정점을 찍게 되는데, 인디라 간디는 아예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데리고나와 '''당을 두쪽 내버리는 걸로 대응했다.''' 그녀가 평소 인사 관리를 잘해왔던 덕이었던지 국민회의 의원들 대부분이 인디라 간디의 편에 섰고, 당내 지도부의 편에 선 의원들은 고작 65명 밖에 되지 않았다. 인디라 간디가 주도하는 인도 국민회의(R)[* 이 갈라진 두 파벌을 구분하기 위해 인디라 간디편 의원들을 인도 국민회의(R). 당내 지도부편 의원들을 인도 국민회의(O)라고 따로 부른다.]은 원내 과반은 차지하지 못했지만 군소 정당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연립정부 구성까지 성공했다. 이로 인해 인디라 간디는 허수아비라는 오명을 벗고 완전히 인도 국민회의를 장악하게 된다. 이렇게 인디라 간디가 인도 국민회의를 통째로 집어삼키면서 인도 정치판은 크게 인디라 간디 세력과 반-인디라 간디 세력으로 쪼개진다. 인디라 간디는 경제성장과 부정부패 근절을 내세우면서 표를 호소했고, 반대로 온갖 야당들이 모여 결성한 반-인디라 간디 세력은 '인디라 하타오', 즉 '인디라는 물러나라'를 외치면서 진영을 결집했다. 인디라 간디는 그 무엇보다 빈곤층 구제와 경제성장을 모토로 내걸고 정책들을 펼쳤는데, 가장 대표적인 정책이 바로 '가리비 하타오' 정책이다. '빈곤을 근절하라'라는 뜻의 가리비 하타오 정책은 주로 농촌과 시골의 극빈층들을 구제하고 고질적인 [[카스트]] 제도를 우회해 정부의 지원을 늘리는 방식으로, 이 정책의 성공으로 인해 인디라 간디는 농촌 지방에 탄탄한 코어 지지층을 쌓을 수 있었다. 덕분에 1971년 치러진 하원의원 총선에서 인도 국민회의(R)은 543석 가운데 352석을 쓸어버렸고, 반면 인도 국민회의 내의 반-인디라 간디 세력이던 인도 국민회의(O)는 겨우 16석, 최대 야당이던 바라티야 자나 상[* 힌두 우익 단체 RSS가 창당한 정당으로 훗날 [[인도 인민당]]의 모태가 된다.]과 [[인도 공산당]]은 각각 22석과 25석 밖에 못건졌다. 1971년 총선에서 대승을 거두고 난 이후 인디라 간디는 1971년 터진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에서 [[방글라데시]]가 원수지간이나 다름없던 [[파키스탄]]에게서 독립해 떨어져나갈 수 있게 크게 지원했다.[* 실제로 당시 인도인들은 여야 가리지 않고 파키스탄을 증오했다.] 결국 1971년 12월에 방글라데시가 파키스탄에게 독립을 해버리면서 사실상 파키스탄의 패배, 즉 인도의 승리로 전쟁이 끝났고, 결과적으로 파키스탄에 빅엿을 먹인 인디라 간디 총리에 대한 인도인들의 지지율은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다. 심지어는 '''야당 당수'''인 [[아탈 비하리 바즈파이]] 대표[* 후에 인도 총리가 됨.]가 인디라 간디를 "현신한 [[두르가]] 여신"이라고까지 칭송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인디라 간디의 지지율이 높게 치솟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정말 파키스탄에 엿을 먹이는 데에는 여야가 따로없었던 인도였기에 가능했던 일. 인디라 간디 총리와 그녀가 이끄는 인도 국민회의는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의 승리를 내세우며 1972년 치러진 주 선거에서 대부분의 지방들을 석권하면서 '인디라 웨이브'라고 불릴 정도로 인도 전역을 싹 쓸어가버리면서 탄탄한 지지도를 굳힐 수 있었다.[* 다만 좋은 일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전시 세금으로 인해 세금이 불어나다보니 국민들의 불만이 증가했고, 1973년의 [[오일 쇼크]]를 얻어맞으면서 경제가 악화되자 인도인들 사이에서 비판이 쇄도했다. 인디라 웨이브가 어느 정도 진정되고 나자 [[비하르]]와 [[구자라트]] 주를 중심으로 인디라 간디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점점 거세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